우리나라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대표적 교육사상가 중 1명을 선정하..
교육학과 - 교육사 우리나라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대표적 교육사상가 중 1명을 선정하여, 그의 생애와 교육사상의 특징을 설명하시오. ..
교육학과 - 교육사
우리나라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대표적 교육사상가 중 1명을 선정하여, 그의 생애와 교육사상의 특징을 설명하시오.
유의사항: 과제물의 작성은 서론에서 그 인물을 선택한 이유를 밝히고, 본론에서 생애와 교육사상의 특징을 설명하고, 결론에서 자신의 평가의견을 제시하도록 하시오.
목차
I. 서론 - 박지원을 선택한 이유
II. 박지원의 생애
III. 박지원의 학문과 사상
IV. 박지원의 교육사상
V. 결론 - 박지원에 대한 평가
VI. 참고문헌
I. 서론 - 박지원을 선택한 이유
박지원(1737~1805)은 “북학파”의 중심인물이다. 북학파란 당시에 중국을 지배하던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과감하게 수용하자는 일군의 학자를 말한다. 이는 형식보다 실용적/실리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이들은 실학의 학문적 계보상 이용후생파에 속한다. 대략 18세기 후반에 그들은 상공업 발전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유통 확대 내지 생산자...
교육학과 - 교육사
우리나라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대표적 교육사상가 중 1명을 선정하여, 그의 생애와 교육사상의 특징을 설명하시오.
유의사항: 과제물의 작성은 서론에서 그 인물을 선택한 이유를 밝히고, 본론에서 생애와 교육사상의 특징을 설명하고, 결론에서 자신의 평가의견을 제시하도록 하시오.
목차
I. 서론 - 박지원을 선택한 이유
II. 박지원의 생애
III. 박지원의 학문과 사상
IV. 박지원의 교육사상
V. 결론 - 박지원에 대한 평가
VI. 참고문헌
I. 서론 - 박지원을 선택한 이유
박지원(1737~1805)은 “북학파”의 중심인물이다. 북학파란 당시에 중국을 지배하던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과감하게 수용하자는 일군의 학자를 말한다. 이는 형식보다 실용적/실리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이들은 실학의 학문적 계보상 이용후생파에 속한다. 대략 18세기 후반에 그들은 상공업 발전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유통 확대 내지 생산자체의 기술적 혁신으로 생산력 발전을 촉진시킬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새로운 문학예술 활동을 전개하는 등 문예부흥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상공업적 기술에 대한 공부는 천민들의 담당할 몫으로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이들의 주장은 가히 획기적이고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선비들이 실학하는 자세가 갖추어지지 않아 농, 공, 상업이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는 현실을 비판했다. 그의 비판의식은 경제사상, 특히 중농, 중상사상을 통해 사회에 유익한 대안으로 승화되었다. 시세변화에 부응한 시무책은 탁견으로 평가된다.
연암은 양반사회의 비리나 현실모순을 풍자적인 소설로 거침없이 비판을 거듭했다. 모순된 현실은 그에게 철저한 비판을 통하여 극복되어야 할 시급한 현안으로 인식되었다. 그는 교육을 교화 차원과 분리시켜 생각했다. 바람직한 인간상 제시는 이러한 인식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그런 만큼 박지원의 생애나 교육사상은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교육 문제 해결을 위한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연암 박지원을 선택하게 되었다.
II. 박지원의 생애
박지원은 영조 13년(1737)에 서울 서대문에서 박사유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연암이며 자는 중미로 본관은 반남이다. 그의 집안은 역대로 귀족 명문이었으며 그런 만큼 시문의 대가도 많았다. 원조는 여말의 문호이자 예조정랑인 박상충이었다. 지돈녕부사 박필균은 바로 그의 조부였다. 이러한 명문의 후혜였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평탄치 못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그는 조부 슬하에서 자랐다. 조부는 어린 연암을 불쌍히 여겨 글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박지원은 16세 되던 해에 이보천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때까지 글을 모르고 있던 연암에게 글을 가르친 것은 처삼촌인 영목당 이량천이었다. 그는 박지원에게 사마천의 사기, 신릉군전을 가르쳤다. 연암은 이 책을 읽고 나서 논설 수백 편을 짓는 등 천재적인 재능을 나타냈다. 이후 그는 학문에 전력하여 경, 병, 농, 전, 곡 등의 경세적인 분야와 서양의 자연과학인 지리학과 천문학까지 통달하게 되었다. 그는 20대에 이미 탁월한 문인이며 개혁적 기질을 지닌 진보적 사상가의 면모를 보였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 사회의 불합리한 측면을 예리하게 풍자하고 꼬집은 양반전을 비롯한 9편의 소설을 썼다.
30대에는 문명이 이미 세상에 알려져 있던 아정 이덕무, 냉제 유득공, 초정 박제가, 강산 이서구 등을 그의 사우로 삼았다. 이들은 낙원동 일대를 중심으로 사국에 관한 토론을 벌였고 당시 세도가들과 위학자들을 거침없이 비판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갔다. 박식하고 천재적인 재질이 있었지만 그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더욱이 부패한 사회상과 양반을 비판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적이 많아졌다. 특히 홍국영이 그를 포함하려고 하자, 이 사실을 친구에게 전해들은 연암은 개성을 거쳐 정조 원년(1777)에 황해도 김천 연암협으로 피신했다. 그는 이곳에서 농서를 깊이 연구했다. 그는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부국강병을 위한 시무책을 제시했다. 소중화주의에 대한 비판은 이러한 그의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개항기 개화사상가에 계승되어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바탕으로 작용하였다.
III. 박지원의 학문과 사상
연암은 세상이 미세한 티끌들의 결합과 운동에 의해 형성된다고 보았다. 기란 이러한 티끌들의 결합을 가능케 하는 활력이며 생령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티끌을 ‘질’이라고 하였다. 또한 ‘천지는 큰 그릇이고 그곳에 가득 차 있는 것은 기이며, 이란 그것을 채우는 소이’라고 하였다. 즉, 그는 이를 기의 존재 이유 또는 존재 목적으로 파악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이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현상들의 의미, 의의, 가치들에 관한 형이상학적 논의와 관련을 맺는다고 보았다. 그는 이의 법칙성을 물지리의 자연법칙을 중심으로 논의하였다. 이러한 법칙이 인간사회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인간평등의 개념이 제기되었다. 그는 자연을 이용대상으로 간주하여 부국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연암은 이상적 인간관을 선비라고 칭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선비란, 관직을 오르기 이전 혹은 오르지 못한 포의의 유생이라는 특정한 사회계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을 하는 사람 모두를 의미하는 초계층적인 개념이다.
‘천자란 참선비이다. 참선비는 인간 삶의 근본이 되는 것이니, 그 직책은 천자이지만, 그 몸은 선비라는 것이다. 직책에는 고하가 있을 수 있지만 그 몸 자체는 달라질 수 없는 것처럼, 지위에는 귀천이 있을 수 있지만, 선비란 옮길 수 없다. 이것은 단지 순위가 더해지는 것이지, 떠나는 것은 아니다.’
라고 했다. 여기서 선비의 해야 할 일이 나타난다. 오직 관직으로 가는 길만이 선비의 길이 아니라, 학문을 올바로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인식하였다. 그는 사회, 역사의 몰락 책임도 선비에게 있으며 이는 선비들의 실학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연암은 선비가 담당하는 일은 농, 공, 상의 일에 직접적인 관련성을 가지면서 또한 구분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는 인간을 만물의 영장 혹은 우주의 치자라 보고, 종속적인 관계보다 상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자료출처 : http://www.ALLReport.co.kr/search/detail.asp?pk=15100332&sid=&key=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