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4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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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에 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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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에 대한 연구

1. 장보고란 누구인가?

일명 궁복(弓福)·궁파(弓巴). 일찍이 당나라 서주(徐州)에 건너가 무령군 소장(武寧君小將)이 되었으나 신라에서 잡혀간 노비(奴婢)의 비참한 처우에 분개하여 사직하고 귀국했다. 해적들의 인신매매를 근절시키기 위해 왕의 허락을 얻어 1만의 군사로 해로의 요충지 청해(淸海:莞島)에 진을 설치하고 가리포(加利浦)에 성책을 쌓아 항만시설을 보수, 전략적 거점을 마련했다. 그리고 청해진 대사(淸海鎭大使)가 되자 휘하 수병을 훈련시켜 해적을 완전 소탕했다.
837년(희강왕 3) 왕위계승 다툼에서 밀려난 우징(祐徵:神武王)이 청해진에 오자 이듬해 우징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839년 민애왕(閔哀王)을 죽이고 우징을 왕위에 오르게 하여 감의군사(感義軍使)가 되었다. 신무왕이 죽고 문성왕(文聖王)이 즉위하자 진해장군(鎭海將軍)이 되었다. 840년(문성왕 2) 일본에 무역사절을, 당나라에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를 보내어 삼각무역을 했다. 845년(문성왕 7) 딸을 왕의 차비(次妃)로 보내려 했으나 군신들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846년(문성왕 8) 그의 세력에 불안을 느낀 조정에서 보낸 자객 염장(閻長)에게 살해되었다.

2. 8~9세기 동아시아세계의 시대상황

8~9세기는 동아시아의 역사상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살펴볼 때에도 매우 흥미롭고 특기할 만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 동아시아 지역의 국가들은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무너지고, 지방의 토호들이 각지에서 자신들의 실력을 쌓아가며 독자적 세력을 형성해 나가던 지방분권적 체제로 변화해 가던 시기였다.
7세기 초에 중국대륙을 통일한 당(唐)은 율령을 정비하고 제도화하여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확립하였다. 당은, 이러한 정비된 통치체제를 바탕으로하여 중국대륙 뿐만 아니라 주변 여러 나라들을 제압하고 명실상부한 동아시아세계를 형성하고, 이를 주도해 나갔으며, 개방적이고 세계적인 제국으로서 역사를 전개시켜 나갔다.
그러나 8세기에 접어들어 율령제를 통한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는 여러 면에서 그 모순이 드러나게 되었고, 그 모순은 안사(安史)의 난(亂; 755~763)으로 폭발하였다. 이 난의 결과 당에서는 율령에 의한 기존의 통치체제가 무너지고 사회는 각 지방의 절도사세력에 의해 주도되는 이른바 번진체제(藩鎭體制)가 성립되었다. 이들 번진세력들은 8~9세기 당의 정국을 주도하며 그들의 세력을 확대하였고, 급기야는 중앙정부에 반항하는 반당적(反唐的) 번진으로 바뀌어 당왕조와 대립하는 양상을 나타내었다. 이러한 현상은 결과적으로 농민들에게는 당 왕조와 번진세력에게 이중으로 수탈당하는 생활고를 가져왔고, 결국 9세기말에 이르면 황소(黃巢)의 난(亂; 875~884)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동아시아세계를 주도해나가던 당은 결국 907년에 멸망하게 되었다.
그동안 한반도의 삼국 중에서 가장 늦게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던 신라는, 7세기 중엽 삼국을 통일하고 당의 율령제를 수용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하였다. 이후 100여년간 신라는 사회 각 분야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통하여 발달된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신라는 8세기말에 이르러 왕권은 진골귀족들의 도전을 받아 약화되고 진골귀족들이 연합하여 정국을 주도해 갔다. 그리고는 이들 진골귀족들 간에 왕위쟁탈전이 일어나 중앙정부는 대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중앙에서 이러한 혼란이 가중되고 있는 사이에, 지방에서는 각지의 호족들이 그들의 세력을 키워나갔다. 9세기에 이르러 신라에서도 지방분권적 양상이 뚜렷이 나타났다. 이러한 양상은 결국 889년(진성여왕 3년) 전국에서 농민반란을 야기하였고, 지방호족들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경우도 비슷한 변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 동아시아세계에서 가장 늦게 고대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한 일본은 7세기 후반에 등장한 야마토정권(大和政權)을 중심으로 종래의 씨족제 국가에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발전해 갔다. 물론 이 과정에서 당의 율령제와 신라의 문물까지도 받아들여 고대국가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8세기 이후 율령제는 갖가지 모순을 드러내게 되었고, 9세기에 와서는 정치권의 붕괴양상까지 뚜렷해졌다. 국가권력의 상징인 천황의 권위는 추락하였으며 이를 대신하여 귀족세력인 후지하라씨(藤原氏)에 의해 ‘섭정정치(攝政政治)’가 이루어졌다. 이렇게 중앙에서는 귀족세력의 전횡이 이루어지고 지방에서는 토호들이 세력을 신장하여 각지에서 할거하더니 결국에는 쇼해이(承平)·덴기요(天慶)의 난(935~941)으로 이어졌다.
일본에 있어서 이러한 변화는 이후의 역사발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승평?천경의 난을 통하여 각지의 토호들은 이른바 ‘무사(武士)’로 성장하면서 이후 일본에서 전개되는 봉건적 정치질서를 주도해 나가게 된 것이다.

3. 청해진이 설치되기까지의 배경

신라 하대(下代 : 780~935년)에는 많은 지식인들이 당(唐) 나라에 유학을 하였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새로운 지식의 습득과 출세를 위한 자신들의 필요성에 의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골품제(骨品制)라는 엄격한 신분 체제 아래에서 제한된 관직과 정치적 출세에 제약을 받던 6두품(頭品) 이하의 신분층을 정치권에서 축출·도태시키기 위한 신라 정부의 방침도 어느 정도는 작용한 것이었다. 아울러 신라 사회 내부의 왕권(王權)을 둘러싼 쟁탈전이나, 경제 질서의 문란 등 정치·사회적 혼란도 당 나라로의 유학을 부추기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장보고(張保皐)는 20대 후반의 나이에 중국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장보고가 당 나라 서주(徐州)의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된 것이 30세 남짓이라 파악되기 때문이다. 본래 해도(海島) 출신이라 알려진 장보고는 신라 신분제 사회에서 그다지 높은 계층은 아니었다고 이해된다. 그러나 그가 중국으로 건너가 곧바로 군대에서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정도의 경제력과 자기 지방에서의 실력을 갖춘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특정한 지방에서 영향력을



자료출처 : http://www.ALLReport.co.kr/search/detail.asp?pk=11011971&sid=qjfRnf777&k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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